어떤 분이 매우 고생한 끝에 성공했습니다. 그런데 그 성공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그만 병이 났습니다. 병원에 가니까 암말기라
1년밖에 못 산다는 겁니다. 주위 친구들이 "고생 많이 한 후 성공했는데 시한부 삶이라니 정말 안됐다“ 라며 병문안 와서 환자를 위로했습니다.
그런데 그중 한 분이 병문안 후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.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하루밖에 못 사는데 친구가 1년밖에 못 산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위문한 셈입니다.
이처럼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릅니다. 다른 사람의 죽음을 걱정하다 바로 자신이 죽음에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. ‘사람은 죽는다’는건 누구나 다 알지요. 하지만 무의식에서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 같습니다. 그러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‘우리 삶이 영원한게 아니구나’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.
제가 처음 죽음이란 걸 생생하게 경험한 건 중학교 때였습니다. 같이 자취하던 후배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는데 작은 돌에 머리를 부딪혀서 갑자기 죽었어요. 광장한 충격이었습니다. 멀쩡하던 아이가 아주 잠깐 사이에 시신이 되었으니까요.
또 제가 중고등학교 때 몸이 아주 약했습니다. 100미터 달리기만 해도 온몸에 파란 반점이 생기고 하늘이 노래져서 쓰러질 정도였어요. 거기다가 우리 스님이 어머니에게 제가 단명할 거라도 말씀하셨기 때문에 늘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. 스님께서 몇 살까지라고 얘기는 안했지만 ‘단명하다면 마흔 전후겠구나’하고 혼자 생각했어요.
그런데 그게 두려움이라기보다 굉장히 열심히 사는 계기가 됐습니다. ‘다른 사람은 칠팔십 사는데 나는 마흔 이내니까 남보다 두 세 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’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몇 번이나 과로로 쓰러져서 의식을 잃을 만큼 열심히 생활했습니다.
그런데 마흔 넘어 살게 되니까 살 만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그때부터는 조급함도 없어지고 편안해졌습니다. 살아있으니까 열심히 일하지만, 갑자기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거예요. 그래서 특별히 하려는 걸 못 해서 미련이 남는다든지 걱정하는게 별로 없습니다.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는데 그 시기를 넘기니까 삶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여우로워진 것 같습니다.
어떤 분이 1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삶의 판정을 받았을 때 흔히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‘1년밖에 못 살기 때문에 괴로운 것’이 아니라 ‘1년밖에 못 산다면 죽음에 사로잡혀서 괴로워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남보다 더 열 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. 그동안 남에게 신세 진 것도 갚고, 칭찬 못 했던 것도 좀 해 주고,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었던 것도 베풀고, 이런 식으로 1년을 정말 기쁘게 산다면 그게 남은 인생을 잘 사는 겁니다.
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만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.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내일 죽어도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.